허생전
박지원
발단 · 묵적골의 가난
남산 아래 쓰러져 가는 초가. 글만 읽는 선비와, 삯바느질로 밥을 잇는 아내.
허생은 남산 아래 에 살았다. 남산 밑 골짜기로 곧장 가면 우물 위쪽에 해묵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사립문 하나가 그 은행나무 쪽으로 늘 열려 있다.
허생은 집에 비가 새고 바람이 드는 것도 그래서 아내가 을 해서 그날그날 겨우
어느 날 허생의 아내가 배고픈 것을 참다못해 훌쩍훌쩍 울며 푸념을 하였다.
그러나 허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아직 글이 서툴러 그렇소.”
“그럼 이 노릇도 못 한단 말입니까?”
“배우지 않은 공장이 노릇을 어떻게 한단 말이오?”
“그러면 장사치 노릇이라도 하시지요.”
“가진 이 없는데 장사치 노릇을 어떻게 한단 말이오?”
그러자 아내가 왈칵 을 내었다.
허생이 이 말을 듣고 책장을 덮어 치우고 벌떡 일어났다.
전개 · 만 냥을 빌리다
종로 네거리에서 한양 제일 부자를 찾고, 처음 보는 변 부자에게 만 냥을 꾼다.
허생은 그 길로 문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서울 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허생은 곧장 종로 네거리로 가서 아무나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여보시오, 서울 장안에서 누가 제일 부자요?”
때마침 그 사람이 변씨 성을 가진 부자를 일러 주었다. 허생은 그 길로
“그러시오.”
허생이 나가고 나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 사람을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그렇다면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선뜻 만 냥을 내주셨단 말입니까? 이름 석 자도 묻지 않고!”
변 부자는 천연덕스럽게 말하였다.
전개 · 안성 과일을 사다
만 냥으로 나라 안 과일을 모조리 사들여, 조선 경제의 얇은 바닥을 보여 준다.
허생은 변 부자에게 만 냥을 얻어 가지고 집에는 들르지도 않고 곧장 안성으로 내려갔다.
얼마 안 가서 나라 안의 과일이란 과일은 모두 동이 나 버렸다. 잔치나 제사를 지내려고 해도 과일이 없으니 상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니, 과일 장수들은 너나없이 허생한테 몰려와서 제발 과일 좀 팔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결국 허생은 처음 값의 열 배를 받고 과일을 되팔았다.
전개 · 제주 말총을 거두다
칼·호미·베·솜을 팔아 망건의 재료인 말총을 독점한다. 양반의 갓이 제주 말에 달려 있음을 가격으로 증명한다.
허생은 이렇게 탄식하고는 또 칼, 호미, 실이며 베, 솜 따위를 모조리 사들여 제주도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것을 팔아 이란 말총은 모두 거두어들였다. 말총은 갓과 을 만드는 재료였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 나라의 갓값과 망건값이 열 배로 훌쩍 뛰었다. 그렇게 해서 허생은 엄청난 돈을 긁어모으게 되었다.
전개 · 빈 섬을 찾고 변산의 도둑을 설득하다
이상을 시험할 빈 섬을 묻고, 변산의 떼도둑에게 농사와 가정의 길을 제시한다.
어느 날 허생은 바닷가로 나가 늙은 뱃사공을 붙잡고 은근히 물었다.
“있습지요. 제가 언젠가 큰 바람을 만나 서쪽 바다로 줄곧 사흘 밤낮을 가다가 한 섬에 닿았습지요. 아마 과 의 중간쯤 될 겁니다. 꽃과 잎이 저절로 피어나고 과실과 오이가 철따라 익고, 사슴이 떼 지어 몰려다니고, 물고기가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더이다.”
허생은 뱃사공의 말을 듣고 더없이 기뻤다.
“자네가 나를 그곳으로 인도해 준다면 평생 함께 부귀를 누릴 걸세.”
뱃사공은 흔쾌히 허생의 말을 따랐다.
허생은 바람을 타고 줄곧 배를 몰아 마침내 그 섬에 이르렀다. 허생은 섬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고는 썩 마음에 내키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하였다.
“땅이 천 리도 채 못 되니 여기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으니 아쉬운 대로 부잣집 늙은이 노릇은 할 수 있겠구나.”
“텅 빈 섬에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대체 누구와 더불어 산단 말씀이오?”
뱃사공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때 전라도 변산에는 떼도둑이 천 명씩이나 우글거리고 있었다. 나라에서는 각 지방에서 군사를 뽑아 올려 도둑을 잡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이었다. 도둑들도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깊은 산속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못하고 굶어 죽을 판이었다.
허생은 변산으로 가서 도둑 떼의 를 찾았다. 그리고 그 우두머리를 만나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 천 명이 천 냥을 노략질해서 나누어 가진다면 한 사람 앞에 얼마씩 돌아가겠느냐?”
도둑의 우두머리는 누구를 바보로 아느냐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거야 한 사람 앞에 한 냥씩이지, 얼마야.”
“그럼 너희들에게 아내가 있느냐?”
“없어!”
“그럼 논밭은?”
“흥, 논밭 있고 마누라 있으면 도둑질은 왜 해!”
“허허, 누구 약 올리는 거냐, 지금!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나. 돈이 없으니까 그렇지.”
허생은 그제야 껄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명색이 도둑질을 한다면서 돈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정 그렇다면 내가 마련해 주지. 내일 바닷가에 나오면 붉은 깃발을 단 배들이 보일 게야. 모두 돈을 가득 실은 배지. 와서 자네들이 갖고 싶은 만큼 마음대로 가져가게.”
허생은 이렇게 말한 뒤에 총총히 가 버렸다.
그러나 다음 날, 도둑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닷가로 나가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과연 붉은 깃발을 높이 올린 배가 여러 척 떠 있고, 배 위에서는 허생이 돈 삼십만 냥을 싣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둑들은 놀라 뒤로 자빠질 지경이었다. 도둑들은 허생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고 모두 넙죽넙죽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저 장군님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래, 어디 너희들이 짊어질 수 있는 만큼 짊어지고 가 보아라.”
허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둑들은 돈 자루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마음뿐이지 기운깨나 쓴다는 놈들도 백 냥을 다 짊어지지 못하였다.
“백 냥도 채 짊어지지 못하는 놈들이 무슨 도둑질을 한단 말이냐? 내 여기서 기다릴 테니, 한 사람 앞에 백 냥씩 가지고 가서 결혼할 여자와 소 한 마리씩을 구해 오너라.”
전개 · 빈 섬에 나라를 세우다
유민을 이끌어 집을 짓고 농사를 짓게 한다. 먼저 부자가 된 뒤에야 문자와 의관을 정하려 했다.
허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둑들은 “예이—.” 하고는 저마다 돈 자루를 짊어지고 “얼쑤, 좋다.” 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허생은 이천 명이 일 년 동안 먹을 양식을 마련해 가지고 도둑들을 기다렸다.
약속한 날짜에 맞추어 도둑들은 저마다 여자는 걷게 하고 소는 몰고, 또는 여자를 소 등에 태우고 돌아왔다. 허생은 이들을 모두 배에 태우고 빈 섬으로 갔다. 허생이 떼도둑을 한꺼번에 몽땅 쓸어 가 버리니 나라 안은 하루아침에 씻은 듯이 조용해졌다.
전개 · 나가사키로 곡식을 팔다
흉년이 든 장기도에 양식을 팔아 은 백만 냥을 벌고, 배를 불태우고 글 아는 사람을 데려온다.
곡식을 거두어서는 삼 년 동안 먹을 양식을 저장하고 나머지는 모두 배에 싣고 장기도로 가서 팔았다. 장기도는 일본의 영토인데, 때마침 이 든 참이라 가지고 간 양식을 모두 팔고 은 백만 냥을 벌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제야 뭘 좀 해 본 것 같구나.”
허생은 가슴을 내밀어 숨을 크게 내쉬고는 섬에 사는 남녀 이천 명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하였다.
그러고는 자기가 타고 갈 배 한 척만 남겨 두고 나머지 배는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은 백만 냥 중 오십만 냥도 바닷속에 던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글을 아는 사람들을 골라 모조리 배에 태우고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전개 · 변 부자에게 돈을 갚다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십만 냥을 갚는다. 변 부자와 친분을 맺고, 이완 대장에게 추천된다.
허생은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남은 오십만 냥을 가지고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러고도 십만 냥이나 남았다.
“이 돈으로 변 부자한테 빌린 돈을 갚아야겠다.”
허생은 참으로 오랜만에 변 부자를 찾아갔다.
“나를 알아보시겠소?”
변 부자는 허생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말하였다.
“자네 얼굴빛이 전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으니 만 냥을 고스란히 잃은 모양이군.”
허생은 껄껄껄 웃었다.
그리고 선뜻 십만 냥을 변 부자 앞에 내놓으며 말하였다.
변 부자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절을 하며 십만 냥을 사양하였다. 그리고 그때 빌려준 돈에다 십분의 일의 이자만 덧붙여서 받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허생은 화를 벌컥 내며,
“그대가 어찌 나를 장사치 취급한단 말인가!”
하고는 소매를 홱 뿌리치고 가 버렸다.
변 부자는 붙잡아 봐야 소용없을 줄 알고 가만히 허생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허생은 곧장 남산 아래 골짜기로 들어가더니,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한 할멈이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저 집이 누구 집이오?”
변 부자는 할멈에게 은근히 물었다.
“허 생원 댁이우. 가난한 살림에 늘 글만 읽더니 하루아침에 집을 나가 다섯 해가 지나도록 안 돌아온다우. 안사람이 혼자 남아 집 떠난 그날을 제삿날로 알고 제사를 지낸다우, 쯧쯧.”
할멈은 혀를 끌끌 찼다. 변 부자는 그제야 그 손님의 성이 허 씨라는 것을 알고 길게 한숨을 내쉬고 돌아갔다.
이튿날 변 부자는 받은 돈 십만 냥을 모두 가지고 가서 다시 돌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허생은 끝내 받지 않았다.
변 부자가 갖은 말로 허생을 설득하여 보았으나 허생은 끝끝내 듣지 않았다. 변 부자는 그때부터 허생의 집에 양식이나 옷이 떨어질 때가 되면 몸소 찾아가 도와주었다. 허생은 언제나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많이 가지고 가면 금방 좋지 않은 기색을 내보였다.
“어째서 나한테 재앙을 떠안기려 하는 것이오?”
그러나 변 부자가 술병이라도 들고 가는 날이면 더욱 반가워하며 서로 잔을 주고받으며 취하도록 마셨다.
몇 해를 이렇게 지내는 사이에 두 사람의 정은 날로 두터워져 갔다. 어느 날 변 부자가 내내 궁금해하던 것을 조용히 물었다.
“다섯 해 동안에 어떻게 백만 냥을 벌었소?”
변 부자는 가만히 다 듣고 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내가 만 냥을 선뜻 내어 줄 거라고 생각했소?”
허생은 대답하였다.
“그거야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지 내가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겠소. 내 짐작으로 내 재주가 백만 냥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일이 이루어지고 말고를 어찌 내 맘대로 할 수 있겠소. 그대가 내게 만 냥을 내어 준 것도, 내가 그 돈을 받아서 백만 냥을 번 것도 결국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내 말을 들어준 그대는 복이 있는 사람이오. 더욱더 큰 부자가 되라는 하늘의 뜻이지. 만약 내가 이 일을 사사로이 했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찌 알겠소.”
변 부자는 허생의 말을 듣고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같은 장사치들은 도저히 상상도 못 할 요, 이었다. 변 부자는 허생 같은 선비가 에 묻혀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바야흐로 지금 사대부들은 을 씻으려 하고 있소.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선비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나설 때가 아니오? 그런 재주를 가지고 어째서 괴롭게 파묻혀 지낸단 말이오?”
변 부자는 허생의 말을 듣고는 길게 한숨을 쉬고 돌아갔다.
변 부자는 오래전부터 이완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때마침 이완이 이 되어 변 부자를 찾아왔다.
“혹시 백성들 중에 신기한 재주를 숨기고 있어서 함께 큰일을 해 볼 만한 사람이 없던가?”
변 부자는 즉시 허생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변 부자의 말을 듣고 난 이 대장은 깜짝 놀라 물었다.
“놀랍구나!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래, 그 사람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
“소인이 그 사람과 삼 년을 가까이 지냈는데 아직도 그 이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냥 허씨 성을 가졌다는 것밖에 모릅니다.”
“그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닌 게 틀림없네. 우리 한번 함께 가 보세.”
위기 · 이완 대장에게 시사삼책을 던지다
이완이 밤을 틈타 찾아온다. 허생은 세 가지 계책을 내놓지만, 이완은 세 번 모두 거절한다.
밤이 되자 이 대장은 수행하는 병졸들을 모두 물리치고 변 부자와 단둘이 허생의 집을 찾아갔다.
변 부자는 이 대장을 잠시 사립문 밖에 기다리게 하고 혼자 안으로 들어가 허생에게 이 대장이 몸소 찾아온 까닭을 이야기하였다. 허생은 변 부자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였다.
변 부자는 하는 수 없이 술병을 풀어 둘이서 잔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변 부자는 술을 마시면서도 문밖에 세워 둔 이 대장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거듭 이야기를 하였지만, 허생은 도무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그제야 허생은,
“손님을 좀 불러 볼까?”
하였다. 그러나 이 대장이 방으로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 대장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다가 서둘러 나라에서 큰일에 쓸 인재를 구하고 있다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허생은 이 대장의 입을 막기라도 하듯 손을 내저었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참 지루하군. 그래, 지금 그대의 벼슬이 뭐요?”
“어영대장입니다.”
이 대장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대답하였다.
“그건 어렵겠습니다. 임금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 어찌 쉽겠습니까? 차라리 그다음 계책을 듣고자 합니다.”
“나는 원래 두 번째라는 것은 모르오.”
허생은 딱 잘라 말한 뒤, 다시 입을 열지 않고 술잔만 기울였다. 그러나 이 대장이 옆에 붙어 앉아 거듭거듭 묻자 마지못한 듯 말문을 열었다.
이 대장은 또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렵겠습니다. 지체 높은 의 어른들이 어찌 하고많은 신랑감을 두고 귀한 딸을 나라도 없이 떠도는 자들에게 시집보내겠습니까?”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도대체 그럼 뭘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럼 아주 쉬운 일이 한 가지 있는데 할 수 있겠소?”
“그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이 대장은 얼빠진 듯 가만히 듣고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대부들이 모두 몸을 삼가고 예법을 지키는 마당에, 누가 제 자식의 머리를 깎고 되놈 옷을 입히겠습니까?”
절정 · 사대부를 꾸짖다
세 가지를 모두 거절당하자 허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예법만 찾는 사대부를 꾸짖는다. 이완은 뒷문으로 도망친다.
그러자 허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럭 화를 내었다.
결말 · 빈집
이튿날 이완이 다시 찾았으나, 집은 텅 비고 허생은 온데간데없다.